들째 날은 w 트레킹 여정 중에서 최고로 힘든 날이다. 왜냐하면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지고 5시간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이탈리아노 캠핑장에 짐을 놓고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도 올라갔다 와야 한다.

 

파이네 그란데에서 이탈리아노 캠핑장으로 이동하는 3시간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길이 크게 험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데 7kg이 넘는 배낭에 보조가방까지 짊어지고 걸어간다는 게 참 보통 일이 아니다. 날씨라도 좋기라도 하면 모를까 바람이 미친듯이 불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날씨가 좋아졌네라고 말하면 다시 빗방울이 내리곤 한다. 왜 여기서는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다고 했는지 경험해보고 알았다. 다행인 건 빗방울이지 비가 많이는 안왔다는 거다.

이탈리아노 캠핑장에 도착해서 이른 점심을 챙겨 먹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도저히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는 힘들어서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든다.시리얼에 빵에 햄이랑 치즈 넣고 참치 캔도 까서 먹고 있는 우리 앞에서 참치 캔에 마요네즈만 비벼 먹던 남정네는 오전에 브리타니코 전망대에 갔다왔는데 꼭 가봐야 한다고 한다. 그 후에 온 런던에서 온 여인은 o트레킹을 돌고 있는 중인데 힘들어서 중간까지만 보고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이 국립공원에 뿌린 돈이 얼마인데 그냥 가기는 아깝고 중간인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는 못 가도 프란세스 벨리까지만 보고 오기로 했다. 사람들이 배낭을 쌓아놓은 곳에 배낭을 두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이탈리아노 캠핑장은 무료라 시설도 열악하다. 수동 화장실은 용변을 보고 나면 페달을 몇 번이고 밟아 컨베이어 벨트처럼 배설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충격적인 화장실에 놀란 가슴을 앉히고 프란세스 벨리로 향했다.

프란세스 벨리로 출발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금방이라도 도착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보다 한참 더 들어가야 프란세스 벨리가 나온다. 프란세스 벨리는 높은 봉우리에 있는 빙하도 멋있지만 360도 어느 광경을 보아도 아름다운 경치가 일품이었다. 갑자기 또 쏟아지는 빗방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려갔다. 물론 브리타니코에 대한 미련은 일도 없었다.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내려갈 때는 금방이었다. 이탈리아노 캠핑장에서 잠시 쉬면서 체력을 보충했다가 꾸에르노스 산장으로 향했다

 

 

배낭을 매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오전에 이미 경험했기에 두려움에 차서 트레킹을 시작했는데 전보다 별로 힘들지 않은 건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수를 끼고 도는 프란세스 산장과 꾸에르노스 산장을 잇는 트레킹은 정말 아름다웠다. 앉아 쉬면서 경치를 바라보니 그냥 계속 이 경치만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산장인 꾸에르노스 산장에 도착했다.

 

꾸에르노스 산장은 참 신기했던 게 많다. 첫째로 침대가 3층까지 있다. 맨 윗층 사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힘 좀 쓰겠다. 둘째로 침구 대신에 침낭이랑 담요를 준다. 근데 예상 외로 침낭이 굉장히 따뜻했다. 셋째로 샤워실에 샤워기가 손이 안 닿을 정도로 높은 곳에 달려있다. 한국 여자 평균키 정도인 내가 손을 뻗고 뛰어도 안 닿을 정도(...) 샤워실 3개 중에 하나는 고장나고 하나는 샤워기 고정시키는 곳이 부서져 있어 쓸만한 곳은 하나 밖에 없었지만 뜨거운 물은 콸콸 잘 나와서 행복했다. 뜨거운 물은 저녁 9시까지만 나온다고 한다. 넷째는 와이파이가 아예 안 됐던 파이네 그란데 산장과는 달리 돈을 주고 와이파이를 구입할 수 있다. 당연히 사지는 않았다고 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트레커들의 성지인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위한 전초기지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제일 유명한 삼봉만 당일치기로 볼 수 있지만 진정한 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국립공원 내의 산장에서 숙박하거나 캠핑을 하며 몇 박 몇 일동안 이동하는 트레킹을 해야 한다. 코스의 모양을 따라 4일의 일정으로 소화가 가능한 w코스와 8일이나 소요되는 o코스로 나뉜다.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지만 문제는 산장의 도미토리 숙박비가 하루에 10만원을 넘을 정도로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캠핑을 할 경우에는 가격이 반으로 줄어들지만 트레킹하는 동안 음식뿐만이 아니라 캠핑 장비도 들고 다녀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그런데도 몇 달 전부터 자리가 없어 예약을 못한다고 하니 홈페이지에서 자리가 날 때마다 간신히 예약을 해서 w트레킹 코스를 완성했다. 비율로 따지면 여행 예산의 엄청난 금액이 소요된 것이다.

정말 우연찮게도 카페에서 같은 날짜에 같은 숙소를 예약한 동행을 만나 함께하기로 했다. 트레킹을 실제로 해 보니 하루도 아니고 몇 일동안 죽어라 걷는다는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절대로 혼자서 할 만한 일이 못 된다. 정말 여기서는 같이 다닐 동행이 꼭 필요하다.

 

트레킹 짝꿍과 함께 아침 일찍 호스텔을 나서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w트레킹은 서에서 동으로 갈 수도 있고 동에서 서로 갈 수도 있는데 나는 바람을 등지고 갈 수 있는 서에서 동쪽 방향을 택했다. 이 경우에는 먼저 푸데토 선착장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9시 배를 타기 위해서 6시 40분 버스를 탔는데 허망하게 배를 눈 앞에서 놓쳐 버렸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어서 당연히 천천히 따라 갔는데 배에 타지 못한 열댓 명의 사람을 남겨 두고 배가 떠나 버린 것이다. 눈 앞에서 배를 놓친 허망함과 어이없음에 기가 찼다. 선착장에는 아디 하소연할 직원 조차 보이지 않았다. 9시 이후에는 11시나 되어야 다음 배가 출발했다. 그렇게 2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추후에 도착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탔다.

 

경치를 감상하고 싶어서 2층 자리에 앉았다. 2층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경치에 푹 빠져 사진을 막 찍은 지 오래되지 않아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과 함께 갑판까지 물이 막 튀었고 사람들은 물을 피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거나 아예 바닥에 앉기 시작했다. 다들 추위에 떨면서 부둥켜 앉은 모습도 장관이었다. 어떤 사람은 강한 바람에 토레스 델 파이네에 도착하자 마자 선글라스를 호수 속으로 날리셨다. 간신히 바람을 뚫고 가격 급상승으로 도달한 23000칠레 페소를 배 값으로 지불하고 첫 목적지인 파이네 그란데 선장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파이네 그란데 선장에서 체크인을 했다. 체크인을 할 때 여권뿐만 아니라 칠레에 입국할 때 주는 pdi종이가 필요하니 잘 챙겨놓아야 한다.

막상 산장에 들어와보니 예약이 어렵다던 말과는 다르게 비어있는 침대가 상당히 많았다(...) 짐을 두고 그레이 빙하로 향하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조리를 할 수 있는 캠핑장 조리실은 불 쓰는 기구를 미리 준비해와야 하기 때문에 산장에서 제공하는 따뜻한 물을 사용했다. 따뜻한 물에 누룽지를 데워 참치캔, 김과 함께 먹었다.

 

밥을 챙겨 먹고 그레이 빙하를 향해 걸었다. 그레이 빙하로 가는 길은 바람을 거스르면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사놓고 가져갈까 말까 고민한 방한 모자가 첫날부터 이렇게 유용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간신히 바람을 뚫고 전망대까지는 도착했지만 여전히 바람이 너무 심해서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다. 짝꿍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는 그래도 이걸 보려고 올라왔는데 하면서 거센 바람 속에서 빙하를 확실히 눈도장 찍고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겠지 했는데 또 내려가다 보니 왜 이렇게 길이 안 끝나나 싶었다. 서양인은 다리가 길쭉길쭉해서 그런건지 다들 우리를 앞질러 갔다. 앞으로는 예상 소요 시간에 1.5배를 해야겠구나 싶었다. 돌아오니 그래도 아직 6시밖에 안되었는데 많이 피곤했는지 씻고 눕자마자 그냥 곧바로 잠들었다.

엘 칼라파테에서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넘어가는 날이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오후 네 시 반에 버스가 출발했다. 역시나 2층 맨 앞자리를 선택했던 내 선택은 오류가 있었다. 창 밖의 신선함도 잠시 같은 풍경에 질려 잠에 빠져들었지만 쏟아지는 햇빛이 단잠을 방해했다.

 

칠레 국경은 검사가 엄격해서 과일이나 채소, 육류 등 모든 식품의 이동이 제한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글에서는 가방 안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서 확인한다는 식으로 써 있어서 약간 쫄아 있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받는 엄격한 검사와는 사뭇 다르게 육로를 통한 국가 이동은 상당히 간단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출국할 때에는 줄 서 있다가 도장 쾅쾅! 칠레로 입국할 때에도 줄 서 있다가 도장 쾅쾅! 배낭은 컨베이어 벨트 하나 통과하고는 그냥 끝이었다.

 

도착했더니 밤 10시 반이 넘었지만 파타고니아의 여름은 아직도 환했다. 버스터미널에 있는 환전소에서 별로 좋지 않은 환율로 달러를 칠레 달러로 환전하고는 5분 거리인 호스텔로 향했다. 호스텔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함께 할 짝꿍을 만나 다음날의 약속을 기약하고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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